짧은 시, 그 귀향의 긴 여정
이 진 흥 (시인)
<1>
언젠가 문인수 시인은, “가장 적은 말 속에 가장 많은 말을 담은 시를 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는 가능하면 시에서는 말이 적어야 하고, 특히 서정시는 길이가 짧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의 길이가 길다는 것은 그 시를 쓴 시인이 시의 핵심에 이르지 못했거나 아니면 변명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적인 에스프리는 짧은 시간에 우주의 핵심을 관통하는 시인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시가 길어지면 설명적인 요소가 개입되게 마련이고 말이 많으면 우주의 비의에 빠르고 비밀스럽게 잠입할 수 없다. 긴 말은 틀림없이 꼬리가 밟히거나 거추장스럽고 순발력이 없어서 다리가 걸려 넘어지기 쉽다. 서정시는 마치 가늘고 예리한 침 한대로 몸 안의 병 덩어리를 박살내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크고 단단한 얼음을 가늘고 예리한 바늘로 쪼개는 것이 바로 그러한 원리인 것이다.
과연 문인수는 그의 말처럼 짧은 시에서 시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 긴 시 보다는 짧은 시를 선호한다. 그의 짧은 시들은 마치 섬광 같은 빛을 뿜는다. 그는 시에서 가능하면 토씨도 쓰지 않는다. 토씨는 응축력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시의 제목도 단음절로 된 것이 많다. 십 년 전엔가 그는 <뿔>이라는 단음절로 된 제목의 시집을 낸 적이 있다. 그 단음절의 된소리처럼 의미도 단단하여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뿔은 육식동물의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 초식동물의 방어용 무기라는 점을 생각해서 그의 시를 마치 초식동물의 한이 내부에서 이마로 솟구쳐 올라와 뿔이 되었다고 쓴 적이 있다. 구차스러운 과정이 생략되고 고통의 응어리가 이마로 불끈 솟아 나온 뿔의 단호함이 바로 그의 시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짧고 단호한 시적 태도와는 달리 그의 시는 매우 느리고 길고 질기다.
마른 호박넝쿨은 길다 질기다.
되넘어 오는
먼 길
여물여물 씹는다.
이 뿔 이 말뚝
이 눈물
고드름 주렁주렁주렁주렁 달리도록
다문 이 말
여물여물 씹는다.
[소] 전문
마른 호박넝쿨처럼 길고 질긴 삶, 그런 삶의 길고 먼 길을 되넘어 오는 소는 순하고 느리며 고통을 안으로 삭이는 동물로서 언제나 느리게 되새김질을 하면서 순명의 길을 걷는다. 소는 반항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참고 순종한다. 억울한 게 있어도 여물을 씹듯 되새기며 안으로 삭인다. <이 뿔 이 말뚝 이 눈물>은 소의 인고와 한과 슬픔이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리도록 말을 다물고 다만 여물만 느리게 씹고 있는 소의 모습은 시인의 내면에 뭉쳐지고 응어리진 한과 인고의 표상이다.
<2>
시인은 십 년 전 그의 두 번째 시집의 표제를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고 썼다. 세상에서 인간의 모든 삶의 궤적은 길로 표상된다. 그것은 인간이 지나다니는 소통의 공간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다 그들의 길을 만든다. 길은 어딘가로 나아가는 지향성이고 누구인가에게 연결되는 약속의 통로이며 낯선 곳을 헤매지 않도록 마련해 놓은 기호이기도 하다. 길을 통해서 인간은 가고자 하는 곳에 도달한다. 길이 없으면 갈 수 없고, 길이 막히면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어느 아프리카 오지로 갈 수 있는 것은 희미하기는 해도 찾아보면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지리적으로 가까운 평양에 갈 수 없는 것은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도달하는 길,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 무서운 길, 아름다운 길, 험한 길,.....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길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세상의 모든 길이 하나같이 집으로 가고 있다고 시인은 직관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길의 귀결점이 집이라면 길을 가는 모든 인간의 지향점이 집이라는 의미가 된다. 시인은 끊임없이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의 시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몸짓이다.
집이란 특정한 공간인 거소로서 삶의 거처이다.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곳, 추위와 폭풍으로부터 지켜 주는 곳이며, 무엇보다도 존재의 고향이다. 인간은 집에서 태어나고, 집에서 성장하며 집에서 먹고 자고 사랑하고 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배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문인수의 집의 심상 중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은 안온한 거소로서의 집이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빈 집>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두메, 빈 집에 들어서니], [두메, 빈 집을 떠나며]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처럼 <여닫히며 허물어지>는 혹은 <돌담장 여기저기가 와르르 허물어>진 빈집이다. 집은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전제한다. 주인이 없는 집, 빈 집은 무엇인가? 비어 있다는 부재의 공간, 그것이 주는 부재의식이 문인수 시의 중요한 성격임을 우리는 직관할 수 있다.
시인은 부단히 집으로 돌아가려고 애쓴다. 그러나 지금 집은 지금 비어 있다. 비어 있는 집은 진정한 의미에서 집이 아니다. 그는 집에서 그의 근원을 만나야 한다. 끊임없이 집안으로 <불러들이던> 그의 어머니를 만나고 <저무는 길 끝 쇠죽 여물 끓는 냄새가 >([눈길]) 나는 그 곳에서 그의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에게 집은 빈집이다. 길 위의 빈집. 이러한 부재의식은 예컨대 <빈 배>([정서, 아우라지의 빈 배]), <그대 단칸 움집마저 비웠구나> ([그대 움집]), 등에서 나타나지만, 결정적으로 [산을 오르며] <산이 없다>는 결정적인 무(無)의 인식에 이른다.
산이 없다
산에 사는 풀 산에 사는 나무
산에 사는 바위 새소리 물소리 조차
문득 하던 말을 감춘다.
산을 불러본다
나의 목청은
수척하고 외로운 목청으로 돌아온다.
언제 춤추는 바람으로 오르면 보이랴.
산이 없다.
[산을 오르며] 전문
시인은 [산을 오르며] <산이 없다>고 노래한다. 산에 오르며 산을 불러보지만 그의 <목청은 수척하고 외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뿐 거기에 산이 없는 것이다. 산을 오르며 산이 없음을 느끼는 그 엄청난 부재의 느낌은 무엇인가? 이미 현실적으로 고향은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일 뿐 현실적으로는 결국 무의 세계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리하여 존재하는 것은 고향이 아니라 고향에의 지향성이 아닐까? 결국 인간은 늘 부재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시인은 모든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지향성을 집에 이르는 길로 보고,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고 직관한 것이 아닐까? <집>이란 어머니가 계신 곳이고 존재의 근원이 되는 곳으로서 바로 고향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결국 부재하는 고향을 향한 존재들이 아닐까?
<3>
시인에게 집은 그의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고향의 중심이고, 고향은 바로 존재의 근원이다. 근원이란 피지스로서의 자연이며, 인공적인 컬쳐(문화)가 아니라 본래 그렇게 있는 네이쳐(자연)이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시인에게 그가 태어나 자란 시골이다. 시골은 도시에 비하여 꾸밈없는 순정성으로서 시인에게는 <달 기우는 대로 달 차오르는 대로 달 끄는 대로 아버지// 소에게 말 전하며 소 따라>([음력]) 가는 곳이다.
내가, 어이 촌놈! 하니까
저도, 어이 촌놈! 한다.
[달에게] 전문
이 두 행의 짧은 시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저 <촌놈>으로 사는 시골의 순정함이 시인에게는 가장 본래적인 삶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한 시인이 고향을 떠나서 지금 헤매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귀향에 대한 의식은 절실하다.
그 중심에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우뚝한 산, <방올음산>이 솟아 있다. 시인의 유년 시절, 아버지와 고향 산에서 내려오는 물살과 소와 하나가 되어 느끼던 복받치던 느낌, 당시에 그가 느끼던 고향 <산의 뿌리>가 바로 근원이다. <부르르르르르 땡기며 복받치던 거/ 저 산의 뿌리를 느낀 적 있다>([방올음산]). 그러한 산 밑에서 때묻지 않은 순정성으로 살던 어린 시절이 고향의 시간적 위치이고 고향 산 아래가 공간적 위치이며 산의 뿌리를 느끼던 느낌이 바로 고향의 심리적 실체인 것이다.
그 고향을 떠나 시인은 지금 <밤 깊어 더 낯선 객지>에 와 있다. 그가 바라보는 먼 산, 그 너머 어디쯤 있을 고향을 생각한다.
나는 그 동안 답답해서 먼 산을 보았다.
어머니는 내 양손에다가 실타래의 한 쪽씩을 걸고
그걸 또 당신 쪽으로 마저 다 감았을 때
나는 연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밤 깊어 더 낯선 객지에서 젖는 내 여윈 몸이 보인다.
길게 풀리면서 오래 감기는 빗소리
[연] 전문
시인은 양 손에다 실타래를 걸고 어머니의 실 감는 일을 도와주는 장면을 떠 올린다. 고향을 떠나 있지만 그는 그 실 끝에 매어진 연이 되어 하늘을 날고 있다. 연줄이 끊어지면 그는 추락한다. 그의 상승의 힘은 어머니가 한 쪽 끝을 잡고 있는 <실>에서 연유된다. 실은 근원인 어머니와 떠돌고 있는 나를 연결하고 있다. 시인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결국은 연줄로 연결된 근원(어머니)에 매어진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그 끈은 또한 고향의 산, 혹은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다. <(아버지!) 붉은 봉분 올려다보며 오줌 눈다./ 根 끝, 예까지 흘러내리는 산,/ 이 길고 긴, 뜨신 끈이여.>([오줌 - 아버지]) 시인은 아버지지 묘소 쪽을 향해서 오줌을 누고, 오줌을 통해서 根 끝으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와 연결되는 것을 <길고 긴 뜨신 끈>으로 느끼고 있다.
<4>
시인이란 운명적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이다. 그는 정들고 친근한 고향을 떠나서 낯선 도시와 강변과 들판을 헤매고 있다. 그가 고향에 안주해 있다면 그는 시인이 아니다. 고향을 떠났으므로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의식이 바로 시 의식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헤맴은 귀향의 역정이다. 그리하여 떠나감과 돌아감 사이의 인력과 긴장이 문인수의 시의 내용이다. 그에게 지금 고향은 도달할 수 없는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점 섬처럼 보인다. 바다로 막혀 도달 할 수 없는 섬, 저녁 때 일몰 속에 멀리 보이는 고향은 그 자체로 그리움이다.
그리움으로 떠 있다
어제는 일몰 아래로 너를 묻었다.
거듭 거듭 묻었다.
나는 그리 밤 새도록 돌아 누웠다.
그 밤바다 파도 소리 다 걷어내고 너는
그리움으로 떠 있다.
[섬] 전문
닿을 수 없는 섬, 고향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그리움이다. 닿을 수 없는 곳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시인은 아름다운 저녁의 일몰 아래로 그리움을 <거듭 거듭 묻>는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 새도록 그 쪽으로 돌아 눕는다. 고향은 밤 바다의 파도소리를 다 걷어내고 안타깝게 <그리움>으로 그냥 거기 그렇게 <떠 있다.>
일몰의 저녁이란 집을 나왔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고향을 떠난 시인은 집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저녁 노을 앞에서 까맣게 타들어 가는 그의 가슴은 온통 고향집으로 가득하다. 어머니가 저녁만 되면 집으로 불러들이던 곳,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던 곳이 절실하다.
저녁노을 속에 서면 머리카락이 탄다.
타관에서 오래 나이만 먹었나니
검불 타는 냄새가 난다.
까까머리 까까머리
해만 지면 자꾸 불러들이던 어머니.
저녁연기 풀어 올리던 굴뚝 생각이 난다.
[저녁노을 속에 서면] 전문
<저녁 연기 풀어 올리던 굴뚝>은 정겹다. 어머니가 장작을 때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부엌이 떠오른다. 부엌은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서 따뜻함과 배부름을 보장해 주는 삶의 중심이다. 타관으로 떠나 있는 시인에게 가장 눈물겨운 것은 저녁연기가 솟아오르는 굴뚝이다. 어머니는 <해만 지면 자꾸> 집안으로 불러들인다. 밖은 춥고 위험하며 낯설고 외로운 곳이다. 집안에서는 모든 것이 감싸지고 모든 것이 용서되며 모든 어려움이 해소되는 곳이다. 집은 바로 그러한 어머니의 영토이다. 그리운 어머니의 곳, 그곳을 향해서 시인은 <이 수렁을 지나 돌아가겠다>([화답])고 다짐한다.
<5>
그러나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길고 멀다. 길다는 것은 극복하기 어렵고 힘든 과정임을 뜻한다. 그의 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시어 <긴> <길다> <길어> 등은 바로 그 점을 암시한다. 길은 앞이 막히고 오히려 <앞이 막혀서 굽이굽이 앞으로 간다>([강]). 때때로 길은 <굽이굽이 막힐 듯 막힐 것 같은/ 길/ 끝에/ 길이 나와서 또 길을 땡긴다>([정선 가는 길]). 따라서 그의 길은 굽이굽이 돌아서 간다. 돌아서 가는 길은 길 수 밖에 없다. <길다>는 것은 끝이 나지 않는 지속이다. 그의 삶은 고통스럽게 지속된다. 이렇게 길고 굽이치는 길을 갈려면 속도를 낼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속도감이 적고 느린 것이 특징이다. 소처럼 혹은 달팽이처럼 느리다. 물론 새도 기차도 등장하지만 느리게 흐르는 강물이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소, 혹은 달팽이가 주는 이미지의 강렬성을 능가하지 못한다. 요컨대 그의 귀향 길은 멀고 길다.
검은 수렁 한복판을 느릿느릿 간다 저런 절 한
채를 뒤집어쓰고 살 수 있다면......... 동해안 아름다
운 길 길게 풀린다.
[달팽이] 전문
이 짧은 작품에서 문인수 시의 진가가 나타난다. 달팽이가 가고 있는 곳은 검은 수렁의 한복판이다. 달팽이는 느릿느릿 가고 있다. 이 스피디한 시대에 달팽이가 느리게 기어가고 있는 모습은 매우 시사적이다. 시인은 지금 달팽이가 짊어지고 있는 집을 부러워 한다. 달팽이의 집을 그는 절이라고 표현한다. 절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존재인 절대자와 만나는 장소이므로, 달팽이의 집이 절이라면 달팽이는 늘 절대자와 함께 있는 셈이다. 절대자는 근원자이고, 우리에게 근원은 고향이다. 그러므로 고향을 통째로 뒤집어 쓰고 다닐 수 있는 달팽이는 따라서 고향을 지향하는 시인에게는 가장 부러운 존재이다. 그가 지금 기어가고 있는 세계가 <검은 수렁 한복판>이라고 하더라도 절을 한 채 뒤집어 쓰고 있으니 어려울 것이 없다. 아무 데나 가던 길을 멈추고 집 속에 들어가면 그곳이 그의 거소이고 안식처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시인은 지금 고향을 떠나서, 낯선 들판을 유랑하고 있다. 그의 유랑은 그를 외롭고 힘들고 지치게 한다. 돌아가려는 고향은 멀고 도달하기 힘들다. 그는 근원이 되는 곳, 절대자가 있는 곳인 절 한 채를 달팽이처럼 가질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이 안 보이는 검은 수렁 한복판을 기어가고 있는 달팽이와 <동해안 아름다운 길>의 대비는 대단히 매혹적이다. 길게 풀리는 동해안의 아름다운 길에서 달팽이의 수렁은 갑자기 해방의 밝고 넓은 공간으로 전환된다. 이 놀라운 이미지의 전환은 읽는 사람들의 의식을 환하게 열어준다. 검은 수렁의 폐쇄성에서 느닷없이 동해안이라는 열린 공간으로의 이행은 시인의 무의식적 희원일 것이다. 이렇게 <길>이 풀린다는 것은 길이 풀려서 무화 된다는 의미가 되고, 꼬이거나 매듭지어 있던 길이 길게, 이제는 갈 수 있게 펼쳐진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하여 이제 문인수의 시는 다음의 [저녁노을]이라는 시 한 편으로 아우러진다. 원래는 [절명시]라는 제목이었는데 절명이 주는 그 엄청난 의미, 그것을 가장 최후의 절대적인 절명의 노래로 부르기에는 감당할 수 없는 탓이었을까? 저녁노을, 길고 긴 한 생애를 마치고 이제 거대한 장엄으로 마무리하는 저녁, 마지막 선혈처럼 자신의 온 힘을 모아서 <단 한 번 활 활 안아들이는 저 눈빛>인 노을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그의 그리움, 그의 고향으로의 기나긴 여정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저녁노을은 덜컥 산마루에 걸린다.
오래 끌고 온 제 어둠 뒤돌아 본다.
단 한 번 활 활 안아 들이는 저 눈빛,
젖어 커다랗게 내려 앉노니
그리고는 아무런 기억 없는
긴 긴 하늘의 꼬리 붉고 아름답다.
[저녁노을] 전문
(*)
(서정시학,2000/하반기)